후기 준비편

제가 [우리말 겨루기]를 어떻게 분석해서 준비했는지 서술합니다.

준비 과정

[우리말 겨루기] 준비 과정은 1월부터 촬영일인 11월 10일까지, 대략 열 달 반이었습니다. 제 준비 과정을 분기별로 살펴보겠습니다.

1분기에는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고,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데 힘썼습니다. 데이터는 wavve 플랫폼에 있는 [우리말 겨루기] 방영분을 직접 보고 문제를 엑셀에 정리하여 총 217회분(4.5년 어치)에 대한 정보를 모았습니다. wavve 플랫폼에는 2015년 3월 방송부터 있지만, 데이터를 모으는 게 너무 힘들어서 2015년 7월 데이터까지만 모았습니다.

데이터를 모으는 중에 예심에 들락거려보았습니다. 1월 예심은 제가 교통 문제로 예심 장소에 5분 늦게 도착해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2월 예심에서는 ‘오늘은 떨어져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봤는데, 생각보다 문제가 잘 풀려서 합격하고 말았습니다. 예심을 여러 번 보면서 “예심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낮은 점수를 받는 사람들과 경쟁하게 될까?”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는데, 예심을 봐보니 다른 사람의 점수를 알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 같아 한 번에 합격한 것이 지금은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1월과 2월에 [표준국어대사전] 전산자료를 받아, [우리말 겨루기] 문제는 주로 어디서 출제되는지 분석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과 함께 국립국어원에서 2005년에 펴낸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 2를 활용했는데, 제 분석에 특히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알려주는 품사와 고유어 여부, 그리고 단어 사용 빈도를 통해 어떤 단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분석의 결과를 바탕으로 3월에는 단어의 뜻을 보고 단어를 알아맞히는 암기를 시작해보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바로 공부자료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어서 시행착오를 조금 겪었습니다. 공부를 두 번 해보다가 엎고, 결국 4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암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공부할 시간을 못 박아두고 (21:30~00:00) 공부했는데, 그렇게 공부를 습관으로 만드니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큰 의지가 필요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림에 쓴 “시뮬레이션”에서는 ‘내가 오늘 당장 방송에 나갔으면 몇 점을 얻었을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친구에게 최신 [우리말 겨루기] 방송을 보고 문제를 ppt에 적은 뒤, 저에게 문제를 보여주고 제가 그 중에 몇 개를 맞히고 틀리는지를 따져 예상 점수를 계산했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2월, 비유적인 표현을 조금 했던 3월에 각각 한 번씩 했는데, 3월 시뮬레이션에서 기출 문제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체감하고 공부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한편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공부한 단어는 웬만하면 빠르게 인지하고 맞힐 수 있음을 확인해서, 단어를 외우는 방법은 유효하다고 판단하고 유지했습니다.

2분기에는 주로 기출문제를 공부했는데, 새로운 문제는 하루에 100개씩 공부하고, 봤던 문제를 하루에 약 700개씩 복습했습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기출 문제를 모두 공부하면 출연해서 얻는 점수의 기댓값이 961점, 대략 5일 공부할 때마다 기대 점수가 약 100점 올라서 동기부여가 쉬웠습니다. 6월부터는 공부를 해도 기대 점수가 전처럼 팍팍 오르지는 않았지만, 최종 점수와 우승 확률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오늘 공부해서 우승 확률이 2%p 올랐다”와 같이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5월 말에 기출 공부를 마무리했는데, 마무리짓기 전 5월 초에 기출을 모두 공부하고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다시 분석했습니다. 2, 3월에는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에 대한 별다른 감이 없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 (내지는 빈도가 1 이상인 모든 단어)에 대한 추세를 분석했지만, 5월에는 기출 문제를 상당히 공부한 상태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나오는 거 같은데…”와 같은 가설이 많이 생겼고, 통계적으로 그런 가설을 분석하고 공부 전략을 다시 세웠습니다.

기출 문제를 모두 공부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는데, 당시 제 기댓값 점수와 거의 맞아떨어져서 제 전략이 먹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출 공부의 다른 장점 역시 느꼈는데, 실제로 공부하지 않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기출 문제를 공부하면서 생기는 감으로 맞힐 수 있는 단어가 늘었습니다.

3분기에는 사용 빈도가 높은 단어를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이 공부가 거의 끝났을 8월 중순에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는데, 2450점 이라는 엄청난 점수가 나왔습니다. 2450점을 얻으면 제 분석상 도저히 질 수가 없었는데, 예상 촬영일까지 3달이 남은 시점에서 이기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해이해져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조금 약해졌습니다.

별도로 7월에 달인3 문제를 분석했는데, 그 때까지 나왔던 4개의 달인3 문제에가 만족하는 여러 조건을 앞으로의 문제도 만족하면 달인3을 맞히는 데 약 5700개의 단어만 공부하면 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 정도 숫자면 덤벼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9월에 출제된 달인3 문제가 분석한 경향에서 빗나가면서 달인3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는 포기했습니다.

9월에는 달인1 기출문제 1200개를 하루에 100개씩 빠르게 공부했습니다. 관용구를 새로 열심히 공부하려고도 했지만, 관용구를 외우는 것이 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9월 중순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시간 소모가 심한 일이 생겨 10월 말에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까지 새로운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6달 정도 공부한 것이죠.) 잠깐 짬을 내어 십자말풀이판 위치에 따른 문제 유형을 분석했는데, 대체로 결과가 제 직관과 들어맞았습니다.

10월 말부터 한글 맞춤법을 슬슬 공부하다가, 10월 28일에 제작진으로부터 11월 10일에 출연이 가능하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공부에 다시 불이 붙어 한글 맞춤법 66개조를 빨리 공부했습니다.

11월 1일에는 [우리말 겨루기] 3회분 내용으로 최종 시뮬레이션을 진행했습니다. 지금까지 시뮬레이션은 저와 진행자만 있었다면, 최종 시뮬레이션에서는 경쟁자를 해줄 친구를 모아놓고 tv에서 문제 제시부터 누름단추를 누를 때까지의 시간을 측정해 따라하게 하는 등 최대한 실제와 같은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최종 시뮬레이션에서 보정한 평균 1608점, 최종 우승 확률은 87%라고 계산했습니다. (한편 최종 시뮬레이션에서는 2500점에 가까운 점수도 나오지 않아서, 제가 이번 출연에서 운이 좋았음을 알 수 있죠.) 세 번의 시뮬레이션에서 달인1 문제를 모두 통과했기 때문에, 달인1 통과 확률이 80~90%로 높다고 자신했습니다.

출연 전 주에는 공부했던 기출 문제 중 정답을 5초 내에 맞히지 못한 문제, 겹낱말, 관용구를 벼락치기했습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첫소리 기출문제를 푸는 것은 굉장히 효율이 낮아 피했지만, 촬영 당일에는 긴장을 풀기 위해 첫소리 기출 문제를 벼락치기했습니다. KBS에 도착해 촬영 준비를 하면서는 순우리말+겹낱말+비유적인 표현에 해당하는 약 500개의 단어를 벼락치기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방송에서 맞힌 “이슬빛”이 있었죠.)

성공의 비결

방송은 아마 제 분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겠지만, 분석만으로 [우리말 겨루기]에서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제가 높은 성적을 거둔 이유는 글머리에 강조했듯 많은 노력 최대한 효과적으로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렇게만 공부하면 된다’는 지침이 있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죠.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니라 (어떤 단어는 53번까지도 복습했습니다) 많은 노력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외우는 방법

다른 사람들은 이른바 적바림을 통해 공부한다고 하는데… 기억력이 요구되는 공부는 특히 복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물리적인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비교적 과학적 근거가 있는 Spaced RepetitionMnemonics를 주로 이용하여 공부를 했습니다. Mind Palace도 써 보려고는 했는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Spaced Repetition

Spaced Repetition은 수많은 문제에 대한 정답을 외우는 데 도움을 주는 공부법입니다. 이 공부법의 핵심은 능동적인 복습학습 난이도에 따라 조절되는 복습 기간입니다. 이 두 가지 복습 원칙을 통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을 수 있습니다.

능동적인 복습은, 책을 훑어보면서 “음, 그렇지.”하고 있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복습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문제를 보고 답하려고 할 때 지식이 머릿속에 잘 보존된다는 연구 결과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Spaced Repetition으로 공부한 저는, 매일 약 800개의 문제를 보고 답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아래 그림의 왼쪽을 보고, “비지떡!”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정답을 확인하는 식입니다.

이 경우에는 제가 무사히 맞혔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을 못하거나 틀리는 문제도 있겠죠? 이런 경우에는 그 날 다시 복습하고, 복습의 주기가 짧아집니다. 반면 제가 연속해서 맞힌 문제는 복습 간격이 점점 길어져, 길면 1~2년동안 다시 복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만큼 기억에 오래 남아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학습 난이도에 따라 조절되는 복습 기간입니다.

저는 Spaced Repetition 앱 중에 Anki를 사용하여 공부했습니다. 기본 세팅을 사용하면 공부한 모든 지식의 약 90%를 장기기억에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Anki로 꾸준히 복습을 했던 덕분에, 4-5월에 집중적으로 공부한 기출 문제를 6달 뒤인 11월까지 안정적으로 맞힐 수 있었습니다.

Mnemonics

Mnemonics는 기본적으로 외우기 어려운 사실을 외우기 쉬운 사실로 변환해서 기억하는 공부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각 달에 며칠이 있는지를 외울 때 손가락을 펼쳐서 따져보곤 하죠. 단어를 외우다보니 서로 헷갈리거나, 너무 흔한 뜻이라 기억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어려운 단어는 뜻풀이의 첫 음절들을 따서 외우는 공식을 만들곤 했습니다. 가령 단어 ‘얼마간’은 뜻이:

그리 많지 아니한 수량이나 정도.

인데 여기서 ‘그많아수’ → ‘그만수’ → ‘그 만수르’ → ‘그 만수르얼마냐고 물어봤다고?!” 라는 저에게 기억하기 쉬운 문장으로 만들어서 외웠습니다. 이 방법은 Spaced Repetition보다는 덜 체계적인 공부법이지만, 많은 단어를 기억하기 쉽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