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일반편

[우리말 겨루기] 5년래 최고 점수를 얻은 사람의 감상

안녕하세요, [우리말 겨루기] 835회 출연자 강성민입니다. 방송을 통해 보셨겠지만 저는 [우리말 겨루기]를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십자말풀이에서 2500점을 득점했습니다. 2500점은 제가 모은 [우리말 겨루기]의 5.5년 방영 데이터 중 가장 높은 점수입니다.

이 글은 가볍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런 작업을 시작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걸 느꼈는지를 다룹니다. 준비한 방법은 쓰다보니 길어져 분리했습니다.

성격 유형

제 외모를 TV에서 보셨으니, 제 내면도 보여드리면 재밌을 것 같아 3종류의 성격 검사를 해보았습니다. 각각 요새 유행하는 MBTI, 심리학자들이 실제로 연구에 쓰는 Big Five 성격 지표, 그리고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측정하는 Dark Triad입니다.

먼저 MBTI 결과를 보여드리면 (그림이 영어인 점은 죄송합니다…):

한국어로는 이 유형을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라고 하더군요. 이 성격에 대한 설명글을 읽어보면, 다른 설명은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 하나는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주의자형 사람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던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고자 기어이는 해내고야 맙니다.

이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수백 시간동안 단어를 외우는 짓은 아마 못했겠죠.

다음은 심리학 연구에 사용되는 Big Five입니다.

개인적으로 Big Five 성격지표가 제 특성을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걸 좋아하고 (높은 개방성), 다수보다는 소수의 모임을 좋아하고 (낮은 외향성), 일이 뜻대로 안되면 불안해하거나 신경질적일 때가 있습니다 (높은 신경증). 성실성은… 스스로 성실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리정돈은 잘 하지 않아서 어중간한 값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 Dark Triad (어둠의 3요소) 는 아마 처음 보실텐데,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남의 말에 공감하기 어려워하는지를 측정합니다. 저도 원래는 이 심리 지표를 몰랐는데, 소위 ‘나쁜 남자’가 여성에게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였다고 주장하는 이 (영어) 논문을 최근에 접하고 궁금해서 측정해봤습니다. 결과는:

나르시시즘 (자기애)와 Psychopathy (얼마나 반사회적인지, 남의 감정에 공감을 못하는지) 측면에서 저는 전체 인구의 하위 20%였습니다. ‘나쁜 남자’의 문턱에도 못 미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뭇 여성에게 인기 폭☆발은 아닌가봅니다.

이상으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간단하게 소개했는데, 이런 사람이 [우리말 겨루기]에는 왜 출연해야겠다고 결심했을까요?

왜 시작했는가?

[우리말 겨루기]에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2019년 11월 30일의 일입니다. 제 일기는 결심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아, TV에 나가야겠다. 그러면 재밌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아무튼 뭔가 인생의 작은 목표가 생긴 것 같아 좋았다.

2019년 12월 01일 일기

TV에 나가는 건 아주 어릴 때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동요를 너무 많이 들은 탓일까요? 아무튼 어릴 때 꿈을 이룬다고 생각하니 조금 신났습니다.

정량적으로 [우리말 겨루기]를 분석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 제 기억에 따르면 저 생각이 들 때부터였습니다. 먼 예전에 [우리말 겨루기]를 보면서 n점을 앞서면 이길 확률이 몇 퍼센트일까? 가 궁금했습니다. TV에 나오고 싶다는 소원을 떠올렸을 때, [우리말 겨루기]가 먼저 떠오른 건 그런 기억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먼 예전에 궁금했던, n점을 앞섰을 때 선두가 이길 확률.

이렇게 다소 뜬금없는 생각을 올해 열심히 붙들어 750시간을 투자한 끝에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것을 느끼고 조금이나마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느끼고 성장한 바

제가 [우리말 겨루기] 준비를 하면서 제일 많이 느낀 건 분석보다도 ‘노력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말 겨루기]는 문제 출제 범위가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정해져 있어 분석이 가능했고, 문제 출제 경향이 일정하기 때문에 노력을 할수록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피부로 체감이 되었습니다.

혼자 [우리말 겨루기] 문제를 보고 풀었을 때 얻었던 점수 (붉은 점)와, 측정 점수에 따라 예상한 평균 점수 (파란 선) 그래프.

지금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직접적인 피드백이 없어 의욕이 있다가도 금방 사그러들기도 하는데, 다시 ‘하면 된다’를 느끼니 새삼 열심히 살고 싶어졌습니다. 원래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유의 말을 무척 싫어했지만, 일이 이렇게 풀리고 나니 조금은 진짜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노력의 효과를 직접 느꼈기 때문인지, 꽤 예전부터 조금 있었던 자기 혐오가 많이 줄었습니다. 이것저것 손대고 많이 노력하면서도 “이렇게 노력해봐야 누가 알아주냐?”며 스스로에게 조소를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이 블로그에 올라갈 도표를 보기 좋게 꾸밀 때, ‘아무도 안 보는 걸 왜 열심히 하냐?’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그런데 제 노력을 PD/작가분들이 알아주시니 감사하기도 하고, 제 노력의 결과로 높은 점수를 얻고 나니 그런 염세적인 마음이 줄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칭찬해주신 그래프 예시.

자기혐오가 줄고 전보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건 [우리말 겨루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 건강한 생활 습관들 들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상 촬영일 대략 100일 전부터 조깅을 시작하고,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며, 공부를 규칙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소홀히 했던 운동을 하니 정신이 맑아져 준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단어를 외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죠. 저는 매일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측정하는데, 제가 올해 평균적으로 제일 불행했던 시간이 제가 [우리말 겨루기] 단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시간과 일치합니다.

그렇지만 다 끝나고 생각해보니, 역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열심히 준비한 과정이 뿌듯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열심히 갈고 닦은 코딩 실력을 이렇게 써먹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무엇보다 20대에 오래도록 남을 추억을 만들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후 계획

이처럼 저에겐 [우리말 겨루기] 준비가 재밌었기 때문에, 내년에도 소소하게 무언가를 해볼까 합니다. 올해는 하루 평균 2시간을 [우리말 겨루기] 준비에 썼는데, 내년에는 하루에 1시간 정도만 투자하고 외우는 걸 하지 않아도 되는 프로젝트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순서대로:

  • 수능 문제 예측
  • (특정 게임을 골라) 인게임 효율 분석
  • 2022년 대선/지방선거 결과 예측 모델 개발
  • 평범한 예체능 취미 (사진, 악기, 목공예)
  • 체스

꼭 내년이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재밌는 일을 또 해서 여러분에게 소식을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의 말

저는 대략 750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투자했습니다. 절대 다수의 시간은 혼자의 노력으로 보냈지만, 몇몇 순간은 주변의 소중한 분들이 빛내주셨습니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제 감사를 표합니다. 개인 정보를 유출하지 않기 위해 초성만 기록합니다. 당사자는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제 프로젝트를 흔쾌히 이해해주신 부모님과 지도교수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제가 본업이 아닌 일을 한다고 했음에도, 제가 본업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믿어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를 믿어주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좋게 봐주시어 예선을 통과시켜주시고 방송에도 제 웹사이트를 띄워주신 [우리말 겨루기] 제작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도, 이 경험도 없었겠죠. 더불어 저와 같은 회차에서 우리말을 겨뤄주시고, 승부가 결정되고 나서는 응원해주신 다른 참가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우리말 겨루기] 시뮬레이션을 도와준 ㅎㅅ, ㅈㅇ, ㅎㅈ, ㅊㅇ, ㅇㅈ, ㅅㅇ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제 실력을 측정하고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제가 이렇게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으리라 장담합니다. 특히 대부분의 시뮬레이션을 도와준 ㅎㅅ에게 감사드립니다.

다소 뜬금없는 [우리말 겨루기] 얘기를 듣고도 저를 지지해준 많은 친구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제 통계에 관심을 가지고, 재미없기 쉬운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피드백까지 해준 ㅎㅅ, ㅅㅇ, ㅇㅅ, ㄷㅇ, ㅈㅇ에게 감사드립니다. (혹시 제가 얘기를 안 했어도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꽤 오랫동안 비밀로 해서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글을 읽고 피드백을 주신 (ㅇㅅ, ㅈㅎ, ㅎㅈ)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솜씨가 없어 처음에는 이 글이 엉망진창이었는데, 여러분이 친절한 조언을 해주신 덕분에 나은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